힘들다. 백기는 끙끙거리면서도 손을 놓을 수 없는 상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왜 조별과제를 내 주셔서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 개별적인 과제였다면 제가 이렇게 끙끙거릴 상황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조원들은 다 뿔뿔이 흩어진지 오래였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임승차를 하려고 하는데 우리가 왜 열심히 해야 하냐면서 시작된 언쟁은 끝날 줄을 몰랐다. 이 상황을 만든 당사자는 오늘 쭉 함께 있지 않았다.

 

교환학생으로 온 중국인 조원 한 명이 문제였다. 그 조원에게 수업은 뒷전이었다.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온 이유는 아르바이트 때문이었다. 돈을 벌어서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가 눈에 띄게 보였다. 오늘 수업이 끝나고 조별 모임을 하겠다고 말했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가야 하니 과제는 알아서 하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 한명이 과제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니 남은 조원들도 열심히 과제를 해야 죽 쒀서 개 준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들 시큰둥했고, 결국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다들 안하겠다는 말만 하고 떠나버렸다.

 

그렇지만 결국 안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다 같이 손을 놔 버리면 결국 죽는 것은 조원 모두인 것이다. 무임승차에 관한 것은 나중에 교수님께 따로 말씀드릴 수도 있는 것인데, 누구 하나가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화두로 삼으며 과제에 대한 것은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백기의 입장에서는 중국인 교환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조원들까지도 다 눈엣가시였다. 누구 하나 저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말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서라도 하겠다. 백기는 이를 악물고 제 조에 떨어진 주제를 살폈다.

 

출산율 저하의 원인과 해결책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는 교양도 일부 학점 이상 들어야 했다. 딱히 눈에 딱 들어오는 교양이 없어서 아무 교양이나 신청한 것이 이런 참사를 가져왔다. 거기다가 이 교수는 눈에 보이는 과정을 중요시하겠다고 미리 말했다. 아마 설문지도 돌려야 할 것이고 아쉬운 소리도 하면서 인터뷰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출산율 저하의 원인? 사실 답은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취업 좀 시켜주세요. 월급 좀 올려주세요. 물가가 내려야 돈을 모으죠. 결혼 하려는데 빚을 져야 해요. 빚 갚기도 바쁜데 애 낳을 정신이 어디에 있나요? 당장 결혼도 못 하는데 애가 태어날 수 있을 리가 없죠.

 

다중이로 빙의해서 인터뷰 자료를 만들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순간이었다.

 

일단 평균적으로 결혼을 하는 나이와 첫 아이를 출산하는 나이가 연도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물가상승률과 평균 임금의 변화도 조사할 수 있으면 조사하는 것이 좋겠지.

 

대략의 메모를 마치고 짐을 챙겼다. 사전 조사 시작이다. 그러려면 오랜만에 도양 도서관- 과의 데이트를 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조원들에게 단체문자를 돌렸다. 이렇게 문자를 하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는 저질러 버릴 것이다.

 

-사랑과 결혼의 경제학 조별과제 조장 장백기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자료조사를 위해 도서관에 갈 예정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도서관에 한 번씩 들러서 개인이 조사할 것들 할당받아가세요. 안 하시면 나중에 교수님께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임승차요? 제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았나요?

 

문자를 적는데 성격이 튀어나왔다. 조원 하나 감싸지 못하고 교수에게 쪼르륵 이르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것보다 무임승차하는 조원을 알고 있으면서도 호구마냥 과제를 다 해주는 바보 같은 내 모습이 더 싫다. 차라리 다 이르는 사람이 되겠다.

 

예상대로 답장들이 흘러들어왔다. 바로 도서관에 가겠다는 말들이었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고 싸우고 간 사람들이 성질 굽히고 나오는 것을 보니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백기는 짐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검색용 PC앞에 앉아 메모해 둔 자료를 검색하고 있으니 누군가가 곁에 다가와 조용히 책상을 두드렸다.

 

, 오셨네요.”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무임승차하는 조원을 그대로 안고 갈 것 같은 분위기라서 제가 성질을 죽이지 못했어요.”

됐습니다. 제가 메모한 것 확인하고 뭐가 더 필요할지 아래에 적어주세요. 여긴 활발하게 대화 나눌 자리는 아니니까요.”

…….”

 

저보다 한 학번 높은 선배였다. 보통 나이 많은 사람들이 조장을 맡기 마련이었지만 그는 한사코 조장 자리를 거부하며 저에게 떠넘기듯 미뤘다. 어떤 일을 주도해서 끌어나가는 것에 미숙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대신 이런 사람은 저에게 주어지는 일은 잘 해내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할 때 드는 비용, 아이를 한 명 낳아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데에 드는 비용 조사.

역시나, 예상이 적중했다. 남자가 제가 적어둔 것들에 내용을 첨가하는 것들을 보며 알았다. 이 사람은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서 건네주면 알아서 할 것이다.

 

벌써 만나셨네요.”

 

남자와 격렬하게 싸우고 사라졌던 여자 조원이었다. 급하게 온 것인지 그녀의 숨소리는 벅차게 느껴졌다.

 

일단 두 분은 나가셔서 좀 풀고 오세요. 앞으로 계속 얼굴 보면서 다녀야 하는데 불편하면 안 되잖아요? 대충 자료 위치는 확인했으니 저도 곧 나가겠습니다.”

……. .”

 

두 사람을 내보내고 자료들의 제목과 위치를 적은 후에 열람실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또 싸우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급하게 나왔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언제 싸웠냐는 것처럼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까지 머금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해는 하셨어요?”

우린 심하게 싸운 것도 아니었고, 사실 공공의 적 한 명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였으니까요. 완벽하게 풀었습니다. 그나저나 그 사람은 끝까지 안 오네요.”

목표가 수업이 아니라 돈일 테니까요. 뭐 어쩔 수 없죠. 그러면 과제 진행해 볼까요?”

 

시작이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백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과제의 방향을 풀어가기 시작했다.

 

 

 

 

 

보고서를 만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교수님의 좋은 평가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딱 하나였다. 제가 문자를 몇 번이나 보냈음에도 계속 씹고 과제에 1그람의 도움도 주지 않았던 조원에 대한 응징!

 

백기는 들고 있는 마이크에 입술을 대고 그동안 벼르고 별렀던 제 속마음을 털어놨다.

 

여러분은 이게 몇 명이서 준비하고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질문에 강의실 내부에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늘어갔다. 교수님 또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다. 백기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것은 세 사람이 준비한 자료입니다. 그렇지만 조원은 네 명이었죠. 문자를 몇 번이나 보내고 참여하라고 독촉도 하고 협박도 해 보았지만 먹히지 않았습니다. 다음부터 보실 화면이 그것입니다.”

 

파워포인트의 화면이 넘어갔다. 제가 보냈던 문자들을 찍은 사진들이 큰 스크린에 떴다. 알바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던 조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사랑과 결혼의 경제학이요? 여기에는 그냥 경제학을 하는 친구 한 명이 있습니다. 사실 경제학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단체 생활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공부를 하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 온 거라면 충분히 불법적인 루트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만.”

 

강의실이 시끌시끌해졌다. 제가 있던 조만의 문제가 아니었는지 손을 들고 개인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사이다다 사이다!! 저희 조에도 있습니다.”

저희 조도요!!”

 

난리가 나 버렸다. 교수님은 급히 제 곁으로 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교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백기는 활짝 웃었다.

 

이번 과제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던 조원이 있었던 조들은 다 말해 주세요. 학점에 반영하겠습니다.”

 

이겼다. 나와 우리는 승리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함께 준비하던 동지들의 표정도 빛나고 있었다. 학점을 거저먹으려던 자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강의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성취감이 물밀 듯이 넘쳤다. 이번 학기도 한 건 해냈다.

 

 

 

 

 

Heart Beat Faster

고군분투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성취감, 짜릿함을 느끼는 것도 과거의 일이었다. 백기는 반복해서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들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해준의 곁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것도 긴장이 되는 것인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오면 백기는 파김치가 되어 뻗어버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고 몸에 익어야 하는데 여전히 불편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대단하게 피곤한 일들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원인터 기획이사가 하는 일들을 보조하고, 평소 상식이 하던 일들을 넘겨받는 것이었다. 한꺼번에 넘겨받지도 않았고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교육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잘렸을 것이다. 실수도 한 두 번이지. 반복되면 그게 좋게 보일 리가 없다.

 

게다가 실수를 하면 저에게 닿아오는 해준의 눈빛이 그렇게 싸할 수가 없었다. 그 눈빛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딱 맞는 수행원이 되겠다면서, 고작 그 정도입니까? 이래서 버틸 수 있겠습니까?’

 

믿겠다고 해 주었던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생 처음 해 보는 수행원의 일이라는 것이 생각했던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아직 완벽하게 숙지한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지만 며칠 해 본 결과 제가 느낀 수행원의 일과는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았다.

 

아침 기상은 6, 해준은 8시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한다고 했다. 6시에 일어나 제 차림부터 정갈히 하고 해준을 깨우기 위해 이동한다. 잠들어있는 해준을 깨우고 씻는 것을 돕고 오늘 입을 옷을 고른 후 피팅을 돕는다.

 

아직 저 일을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었다. 상식이 저보고 해 보라고 해서 떠밀리듯이 해준의 곁으로 갔더니 해준이 정색하며 저를 밀어냈던 것이다.

 

이건 안 해도 됩니다. 도움을 받을 바에 나 혼자 하겠습니다.”

 

이러고서는 혼자서 들어가서 씻고 나와 버렸다. 물론 제 입장에서도 목욕시중이라는 것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으니 이렇게 된 것이 나쁘지는 않은데 영 기분이 찝찝했다. 그 찝찝함은 상식의 말을 들으면서 더 커졌다.

 

장백기씨, 도련님이 스스로 하는 일이 저렇게 늘어나버리면 이 저택에 수행원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져. 장백기씨 밥줄 끊어진다고.”

 

절대로 잘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적응하고 버텨내서 떳떳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돌아갈 곳도 없으니 더 악착같이 버텨야 하는데 해준은 오히려 제 일을 없애고 있었다. 내일은 꼭 어떻게든 같이 들어가서 도와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민망함과 불편함 따위, 일자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옷을 고르는 것도 어려웠다. 산 속에 살면서 무슨 옷이 이렇게 많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때가 더 많은데 집에서도 불편한 정장차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짓수는 많은데 제 눈에는 그 옷이 그 옷 같았다. 해준이 짚는 것마다 그것도 좋아요, 이것도 좋네요. 그런 대답만 하는 저에게 돌아오는 말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장백기씨는 옷보는 센스가 없군요. 이건 이미 3년이 넘은 디자인입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울컥 했지만 속에 있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도련님이 센스가 없다고 말하면, ‘네 저는 센스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 수행원의 일이니 말이다. 고르는 것은 못 해도 옷 입는 것 돕는 것은 잘 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제 의지도 단숨에 꺾어버렸다.

 

옷도 제가 알아서 입겠습니다.”

 

상식은 소리 죽여 웃으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래요, 정말 저 잘릴지도 모르겠네요.’ 라고 말하며 웃을 수는 없었다. 센스를 익히려면 검색을 하고 공부해야 할 텐데, 여긴 인터넷이 전혀 터지지 않는다. 발전의 여지라곤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피팅까지 마치고 나면 아침 식사를 위해 이동한다. 해준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음식 수발도 든다. 식탁이 워낙 넓은 탓이다. 반찬 하나하나를 작은 종지에 덜어서 해준의 앞에 가져다두고 저는 멀리에 있는 반찬들을 불편하게 먹는다. 제가 불편하게 먹는 것을 보면 덜어둔 반찬 같이 먹자고 할 법도 한데 그러지도 않았다.

 

다른 사용인들은 식사 때 해준과 겸상하지 않았지만 저와 상식은 예외의 범주가 되었다. 상식 또한 저처럼 멀리에 있는 반찬들을 불편하게 가져다가 먹는 것으로 봐서 원래 이렇게 먹는 것이 일상인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젓가락을 공유하기 싫은 마음이겠지. 무척이나 깔끔 떠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식사를 마치면 해준과 함께 해준의 방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수행원의 일도 시작된다. 상식은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저는 할 수 있어서 추가된 업무였다. 이 업무 때문에 해준이 제 일을 덜어주고자 혼자서 목욕을 하고 옷을 입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해준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원인터의 비서 말고 저택의 비서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원인터 기획실에서 있었던 업무들을 해준은 여기서 확인하고 승인을 하는 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원인터의 일을 제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제 상식선에서 이게 제대로 된 보고인지 아닌지를 1차적으로 걸러내는 것이 전부이지만 말이다.

 

무척이나 원했던 일이고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의욕과 실력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일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힘들었다. 해준에게서 가장 차가운 말이 많이 날아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휴…….”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저를 지적하던 해준의 눈빛이 떠오르고, 그 눈빛을 통해 스스로의 무능함을 체감했다. 백기는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지 않음에 허공에 크게 발길질을 했다. 그럼에도 답답한 속은 풀어지지 않았다.

 

 

 

 

====================

 

하비패를  찾아주는 분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