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인 입장에서 서류의 내용을 확인하고 걸러낸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해준이 말하는 상식과 제가 이해하는 상식이 전혀 달랐다. 기업가적인 마인드와 아래에서 일을 하거나 소비를 주로 했던 사람의 마인드가 같을 수가 없었다.

 

장백기씨, 오늘 제가 봐야 할 서류들 이게 전부입니까?”

제 기준에서 제한 것은 그 정도입니다.”

 

제 말을 들은 해준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백기는 놓치지 않았다. 역시 뭔가 탐탁지 않은 것이다.

 

안되겠습니다. 장백기씨가 걸러낸 보고서들 다 가져오십시오.”

.”

 

제가 건넨 보고서들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해준을 보며 백기는 안절부절못했다. 저기서 꼭 해준이 확인하고 승인해야 할 보고서가 있었다면 또 실수를 하는 것이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해준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장백기씨의 상식은 제 상식과 많이 다른 것 같군요. 집사님과 달리 서류를 볼 줄 안다고 해서 좀 의지해볼까 했는데 안 될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차별화되었던, 저만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백기의 마음이 불안에 흔들렸다. 이전에 헬기 조종을 하던 사용인이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일 못하면 가차 없이 자른다고 했는데. ‘, 그럼 나는 잘리겠구나.’ 이대로 잘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백기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빌듯이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일이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따라가겠습니다. 못난 수행원으로 머물지 않을 테니 자르지만 말아주세요.”

 

간절하게 빌며 해준을 보았는데 해준의 표정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제 말에 크게 동요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정말 잘 할 테니까…….”

왜 앞서갑니까? 제가 자르기라도 하겠다고 했습니까?”

?”

 

해준의 목소리에 노기와 짜증이 섞여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화가 난 것 같지? 내가 방금 화가 날만한 소리를 했나?

 

내가 자른다는 말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 아니요.”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합니까? 그렇게 본인에게 자신이 없으면서 저에게 자신감 넘치게 말했던 겁니까? 내가 사람을 그렇게 쉽게 자르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기분이 상할 만도 할 것 같다. 가볍게 업무에 대한 지적을 한 것뿐인데 듣는 상대방 쪽에서 열심히 할 테니 자르지만 말아달라고 사정하는 그림이 되었으니 말이다. 앞서갔다는 말이 뭔지 알았다. 여전히 자신은 강해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색안경을 쓰고 있었고, 그 색안경은 해준의 행동과 생각을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워낙 다른 직장에서 쉽게 사람을 자르는 것을 보았고 당해왔다 보니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니실망이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오늘 저녁식사까지만 동행하고 쉬면됩니다.”

……. .”

 

해준의 뒤를 졸졸 쫓아 식당에 가서 해준과 함께 불편한 식사를 하고 하루의 마무리를 지었다. 처음으로 투입되는 차별화된 일에 나의 입지가 조금은 더 빛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고, 오히려 실망만 안겨주었다.

 

목욕시중도 못 들고 있고, 사소한 일로 호출하는 것도 저보다는 상식이다.

 

아직은 교육기간이니까.’

 

상식은 그렇게 말하며 저를 위로하다가도,

 

이렇게 일이 줄어버리면 진짜 장백기씨 잘릴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불안한 소리를 하곤 했다. 오늘 처음으로 시작한 일도 시원찮았다는 이야기를 해준에게 듣게 된다면 장백기는 잘린다, 라고 확신할지도 모른다.

 

원래 장백기라는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독하게 변하는 편이었다. 편법, 꼼수, 무임승차를 좋아하지 않았고, 학창시절 정의롭게 무임승차자들을 처단한 적도 많다.

 

정의롭고 당차며 자신감이 넘쳤던 장백기는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며 생계를 꾸리는 프리터*가 되고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사라져갔다. 많은 사장님들을 모셨고, 사장님의 비리를 보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내가 부당한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잘릴 것이 두려워서 손해를 보며 일을 했다. 나는 내 시간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복잡한 일이 생기게 되면 떠맡지 않았다. 해결해야겠다는 욕심이나 오기 같은 것은 점점 줄어만 갔고 현실에 타협하며 물 흐르는 대로 날 맡기고 손해 보는 삶이 익숙해졌다. 무력해져버린 것이다.

 

*프리터: 영어의 '자유로움'을 뜻하는 프리(free)와 '아르바이트'(arbeit)를 합성한 일본의 신조어로 특정 직업을 갖지 않고 평생 아르바이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금도 그랬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정면으로 부딪힐 용기나 의지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신세 한탄만 신나게 할 뿐이었다. 인터넷이 되지 않으니 유행하는 옷을 검색할 수도 없고, 저에게 철벽을 치는 해준에게 왜 나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냐 말하며 바락바락 대들 용기도 나지 않고, 근무 외의 시간에 찾아가서 서류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배우고 싶다는 말을 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괜한 자격지심이 생기고 자존심이 상한다.

 

낙하산 따위에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줄을 잘 타고 나는 것도 실력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색안경은 벗어지지 않는다.

 

아주 잠시였지만 색안경을 벗었을 때가 있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꽉 누르고 있던 감정에서 해방되어 엉망이 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해준은 그 순간 저에게 다정했다.

 

눈물을 펑펑 쏟는 자신을 꽉 안아주며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던 해준을 기억한다. 아직도 생생하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진다. 저에게 했던 말이라고는 사무적이고 차가운 말들밖에 없었는데, 그 때는 평소와 같은 남자답고 딱딱한 어투였지만 무척이나 따뜻한 말을 건넸었다. 딱딱한 형태의 말이지만 담겨있는 마음은 딱딱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것이 저를 감싸 안아주는 기분이라, 저에게 너른 품을 빌려주고 있는 사람이 제가 모셔야 하는 도련님이라는 것도,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이성도 잃고 온갖 추한 모습은 다 보였었다. 눈물이 흐르다 못해 콧물까지 흐르는 상황이 되어 해준이 건넨 휴지를 받아들고 팽 하고 코까지 풀었었다.

 

해준은 그 날 저를 끝까지 배려하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차에 오를 때도, 헬기에 올라서도 해준은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왜 울었냐고 더 캐묻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앞에서 티 나게 자신을 위로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어주는 것이 저를 위한 것임을 알았다. 저택에 돌아와 방 앞에 섰을 때 해준은 저에게 말했다.

 

오늘은 푹 쉬십시오. 내일 봅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보자는 말에 안도가 밀려왔었다. 온갖 추태를 다 보였으니 해준의 마음이 변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때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말로 알려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정한 모습은 그 날, 그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해준은 공적인 사람이었고, 업무 평가에 있어서는 가차 없었다. 처음이니 실수할 수도 있죠, 그런 식의 위로도 없었다. 장백기씨는 센스가 없군요, 이건 저 혼자 하겠습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넘어가고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 해왔다는 사람이 제가 오자 스스로 하는 일들을 늘려간다. 이것이 저에게 결코 좋을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일은내일은 기필코 해내겠다.”

 

기필코 욕실에 난입하고야 말리라. 내가 목욕시중을 들고야 말리라. 어떻게든 하나라도 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렇지만 당장 유행하는 옷들을 알아내는 것은 제 눈썰미나 정보에 문제가 있었고, 보고서들에 익숙해지는 것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니 가장 단기적으로 잘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하는 식사나 목욕시중밖에 없는 것이다.

 

무척이나 꺼리던 일을 기필코 해내고야 말겠다고 투지를 불태우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내가 대학에 있다고 생각하자. 저택에서 쫓겨나지 않아야 A+를 받는다는 조건. 쫓겨나지 않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무임승차자를 밀어내던 과거의 장백기의 투지를 살려내자. 어떻게든 해내자. 주먹까지 꼭 쥐며 결심했다.

 

 

 

 

 

백기가 교육을 받은 지 4일 차. 오늘은 따로 백기를 볼 수 없는 날이다. 상식에게 들었던 바에 따르면 수행원은 주 5일제, 남은 시간은 상식을 부르면 된다고 했다. 이번 주가 지나기 전에 이틀의 휴무를 주어야 했으니 그것은 이번 주말이 될 것이었다. 분명 그랬다.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백기였다. 해준이 고개를 돌려 시계를 살폈다. 7, 수행원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각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 일 하러 왔…….”

장백기씨, 근무 조건 못 들었습니까?”

?”

일주일 중 이틀은 휴무를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풀로 일했으니 이번 주의 남은 이틀은 쉬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

 

백기의 표정에서 아차 하는 감정이 드러났다. 정신없이 교육을 받으며 휴일의 개념을 멀리로 날려버렸나 보다. 날이 가는 것도 잊을 정도로 일이 고되고 힘든 것일까?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지만 표현하지는 못했다. 상식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혼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는 다른 고용주들처럼 사용인을 막 부리지 않으니까요. 오늘 일 안한다고 자를 생각도 없으니 돌아가서 쉬십시오.”

……

돌아가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그게, 도련님께서 불편하지만 않다면 저는 오늘도 수행원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월급 더 달라는 것 아니고요 자발적인 겁니다.”

 

다급하게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하는 백기를 보며 해준은 당황했다. 왜 쉬게 해 주겠다는데 일을 하겠다고 그러는 것일까? 물론 저야 조금이라도 더 백기를 곁에 둔다면 좋을 것이지만 백기가 일을 하겠다는 것이 꽤 억지스럽게도 느껴지고 무리 하는 것으로도 보여서 이유를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이유가 뭡니까? 휴일에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하겠다는 이유 말입니다.”

……. 서투니까요.”

다른 직장에서도 그랬습니까?”

다른 직장에서는 수습기간동안 급여도 적게 받았고 근무시간은 더 길었습니다. 도련님이 원리원칙을 칼같이 지키시는 거라고요.”

 

대체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며 지내왔던 것일까? 손해를 보고 살아왔던 자신의 삶들을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다른 직장들에서 부당한 대우를 꽤나 많이 받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깐 보았었던 백기의 이력서를 떠올렸다. 꽤나 많은 곳들이었는데 그 모든 곳들에서 손해를 보면서 일을 시작했다는 말인가. 순간 화가 치솟았다.

 

심장이 아릿했다.

 

으읏.”

도련님?”

 

낮은 신음을 뱉으며 가슴을 움켜잡자 백기가 눈을 크게 뜨고 제 곁으로 다가왔다. 해준은 남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괜찮습니다. 가끔 이럽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대신 원인이 좀 이상한 데에 있기는 했다. 제 심장이 궤도를 잃는 순간은 저를 낳아준 부모님이 연관될 때뿐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들과 얽혀야 할 순간은 있었고, 여전히 그들에게 받은 상처는 아물지 않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지금의 아픔은 부모님이 관련되어있지 않았다.

 

백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과거의 이야기를 스쳐가듯 들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들은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살았겠구나 싶다는 생각만 할 정도로 아주 가벼운 이야기다. 그런데 화가 났다. 백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욱 했고, 심장은 아파왔다.

 

지금까지 백기는 엉망이 된 제 심장을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역할을 해 왔다. 아픈 순간 백기를 생각했고 그 날을 떠올리며 아픈 심장을 달랬었다. 그런데 오늘은 백기가 제 심장을 흔들고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약이라고 생각했지만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가끔 그러는 게 왜 별 거 아니에요? 병원은 가 보신 건가요? 아닌 거면 병원부터 가요!”

 

백기가 하는 말에 아팠던 심장이 언제 아팠냐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보통 제가 괜찮다고 말하면 다들 괜찮다고 생각하고 넘긴다. 저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다 지켜보았고 도움을 주었던 유모와 상식만이 제 사정을 알고 있을 뿐, 다른 사용인들은 모른다. 그들에게 괜찮다고 하면 그들은 다 괜찮은가보다, 하고 제 곁에서 멀어졌었다. 그런데 백기는 달랐다. 괜찮다고 말함에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그래,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 너는 장백기다.

 

병원은 주기적으로 잘 다니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 진짜 멀쩡합니다.”

어휴…….”

 

긴장을 푼 백기의 한숨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안도하는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져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꺼내기 힘든, 저에게 또 다른 아픔이 될 수 있는 백기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 할 것 같다. 독이라고 해도 좋다. 독도 약으로 쓸 때가 있으니 말이다.

 

 

 

 

 

=================

 

조금 이른 주말의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날이 추워서 자야겠어요~_~

그래서 조금 빨리 올리고 갑니다!

 

언제나 찾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