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이후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정신적인 외상에 취약해진 몸은 이전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 생명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스트레스 상황은 최대한 배재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다. 다수의 사람들과 접촉해야 하는 상황들은 제 삶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학창시절이라는 것이 없었다. 학생으로 소속되어 공부했던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그 이후에는 집에 가정교사가 방문에 11로 수업을 진행했다. 아버지가 손을 잘 써서 제 이름이 적힌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학교에서 친구들과 부대끼며 지내왔던 것은 아니다.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상식에게 전해 들었을 때 그다지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아쉽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 때 제 생각의 중심에는 부모님들 밖에 없었고, 다른 아이들의 부러워하는 시선들은 오히려 불편했었다. 그들이 부러워하는 제 환경은 저에게 별 것이 아니기도 했고, 오히려 저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드는 배경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부러움의 시선에서 벗어나게 되면 마음을 불편하게 짓누르던 것 하나가 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혼자서 있는 긴 시간들에 익숙해졌다. 점점 조용해져가는 제가 불안했던 것인지 상식은 자신에게만은 어리광을 부려도 된다고 종용했다.

 

도련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애늙은이 싫어합니다.”

애늙은이요? 그게 뭔데요.”

뭐긴 뭡니까? 도련님이지요. 그렇게 세상 다 산 사람처럼 굴지 말란 말입니다. 그래봐야 아직 초딩이라고요 초딩. 초딩이면 초딩답게 굴어야지, 조용하게 창밖만 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모습이라니, 보기만 해도 피곤하단 말입니다.”

 

해준은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잇값 못하는 것이 더 보기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지금 제가 보는 상식이 그랬다. 스물이 넘은 어른이 제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왁왁 터트리는 것 하며, 자신의 생각을 저에게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대답 없이 가만히 상식을 보고만 있으니 상식이 답답한지 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도련님 제발요. 제발 어린아이답게 굴어주십시오. 제가 다 해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주인어르신에게 하고 싶었던 것들 저에게 대신 풀어버린다고 생각하시고 하세요. 다 받아드리겠습니다!”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것이라. 실은 무척이나 많았었는데 그것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난다고 해도 상식에게 어리광을 피우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고용주이고 상식은 사용인인 입장이 아닌가.

 

싫어요. 안 할래요.”

도련님!”

기억도 잘 안 나요. 분명 원하는 것이 많았는데, 한 번 아플 때 다 털어버리기라도 했던 것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됐어요, 안 할래요.”

 

저를 보는 상식의 눈빛에서 안타까움이 읽힌다. 동시에 오기도 읽혔다. 그러나 상식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제가 기억해내지도 않을 것이고 요구하지도 않을 테니까.

 

휴우.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러면 제가 대충 알아서 하겠습니다.”

 

포기할 거라 생각했던 상식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력이 활활 불타는 것처럼 보여서 해준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알아서 하겠다니뭘요?”

평범한 가정에서 제가 부모님에게 받아왔던 것들을 도련님에게 하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허허.”

 

가장 동경했던 평범한 가정, 그 안에서 누구보다 밝게 자라난 상식. 그런 상식이 저에게 그동안 누려왔던 것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누리지 못했던 것들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럼 우선 목욕부터!”

 

그렇게 말을 꺼내며 제 몸을 들어 올리는데 해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소리만 빼액 지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하는 건데요! 내려놓으라고요, 아 아저씨!!”

원래는 목욕탕에 가야 하지만, 그건 여의치 않으니 이 정도로 하자고요. 등 밀어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씻느라 힘드셨죠?”

, 싫어요! 싫다고요!!”

 

바락바락 싫다고 대들고 우겨봐야 어쩌겠는가. 상식은 어른이고 저는 작은 아이였다. 반항한다고 해도 그 반항이 먹힐 리 전무했다. 결국 욕실에 끌려가 상식의 앞에서 발가벗고 몸을 맡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거 봐요. 혼자 하니까 제대로 씻지를 못하잖아요. 이거 보여요? 때가 국수처럼 나온다고요.”

 

이태리타올을 들고 제 몸 구석구석의 때를 미는 상식 때문에 해준은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 아픈 타올이라는 것을 몸에 댄 적이 없는데, 따끔따끔함에 칭얼거리고 싶어도 자존심이 상해서 이를 꽉 악물고 참고 있었다. 그렇게 참고 있는 자신에게 제 몸에서 나온 때를 보여주는 상식이라니, 너무하다.

 

자존심은 상하고, 때를 눈으로 확인하니 부끄러워서 숨어버리고 싶은데. 반면에 이 순간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가 아들의 때를 밀어주며 놀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그랬을까? 저를 걱정하고 있는 상식의 진심까지 더해져 이 순간은 무척이나 부끄러우면서도 따뜻하게 기억될 것 같았다.

 

 

 

 

 

도련님, 이제 클 만큼 크셨는데. 샤워 정도는 혼자서 하시지요. 다 큰 어른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싫다고 바락바락 우기던 날 억지로 끌고 들어와서 이 즐거움을 알게 한 게 아저씨지 않습니까. 남이 해 주니까 편하고 좋더라고요. 이제 제 손을 움직이기가 싫습니다.”

 

나이가 먹어서도 상식의 목욕 시중은 끝나지 않았다. 누리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자신은 끈질기게 그 시간을 사수하고자 했다. 상식은 잔뜩 짜증을 낸 얼굴을 하면서도 고용주의 요구에 응했다. 씻고 나온 후 해준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알아보셨습니까?”

. 평범하게 살고 있는 중학생이더군요. 혹시 그 학생 이전에도 저에게 찾아보라고 했던 사람 아니었습니까? 대체 누굽니까?”

글쎄요.”

 

제가 상식에게 부탁했던 것은 백기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마지막이었는데 벌써 중학생이란다. 그 때보다 더 많이 자랐겠구나. 해준은 상식이 건네는 자료들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그 얼굴이 남아있네요.”

도련님 참 이상한 것 알고 있습니까? 이거 어떻게 생각하면 스토킹이고 범죄라고요.”

제가 이 사람에게 찾아가서 해코지를 하길 합니까, 피해를 줬습니까? 잘 지내는지 확인만 하는 게 뭐가 이상합니까?”

그래서 더 이상한 겁니다. 차라리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사이라면 이렇게 의심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지켜보기만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짝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죠.”

짝사랑이요?”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남자를 상대로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저 백기는 저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 그렇지 않습니까. 은혜를 입었던 상대라면 은혜를 갚겠다고 찾아가서 보상을 했겠지요. 이제 저는 좀 알아야겠습니다. 장백기라는 사람이 도련님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 주기적으로 행방을 묻고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는지 말입니다.”

 

어떤 존재일까. 해준은 서류봉투 안에 들어있는 백기의 사진들을 꺼내들어 최근의 모습을 확인하며 고민했다. 백기가 저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인 것은 맞았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로 특별한 것인지, 그것을 자세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고민하며 사진을 넘길 때였다. 혼자가 아닌 함께,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하게 지내는 중학생이라고 했다. 매일 시간에 맞춰 등교를 하고, 친구들을 만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수업을 듣다 졸아서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하고, 점심시간에는 부지런히 급식실로 달려가 조금이라도 앞에 서서 밥을 받으려 하는, 그렇게 밥을 먹고 나서도 넘치는 식욕에 친구들과 함께 매점에 달려가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나오는 그런 생활. 백기의 삶이 짐작이 되었다.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히고 웃고 있는 모습이 즐거워보여서 저도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곁에서 함께 웃고 있는 몇 명의 남자들을 보자 올라갔던 입 꼬리는 금세 내려가 버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상한다. 당연히 친구들이 곁에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저에게 따뜻함을 전했던 상대였다. 당연히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백기의 그런 따뜻함에 몰려들었을 것이다.

 

나만 아는 따스함이 아닌 모두가 알고 있는 따스함.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애정. 생각이 이상하게 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쉬이 제어되지 않았다. 심장이 아팠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아저씨저 약 좀 주세요.”

어휴……. 평범한 일상에 대한 동경에서 부모님 생각은 그만 하시라고요.”

 

부모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백기와 백기의 곁에 있는 친구들을 보았을 뿐이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 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심장을 공격하는데 상식에게 물어보기가 겁이 났다. 해준은 딱 하나의 생각을 반복하며 이상하게 튀려는 감정을 통제했다.

 

사랑은 아닐 거야, 이게 사랑은 아닐 거야.

 

상식이 건네는 약을 삼키고 진정되는 심장을 느끼며 해준은 길게 숨을 내 쉬었다. 심장이 아파오고 호흡이 불규칙해질 때마다 위기와 공포를 느꼈다. 10년 이상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고 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죽음에 가까운 공포였다. 그 공포에서 자신을 구해주는 역할을 백기가 하고 있다. 백기가 저에게 사랑일 수는 없었다. 그보다 더 큰 존재는 될 수 있어도 말이다.

 

아저씨.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걸 보면 보통 기분이 어떤가요?”

?”

아저씨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나요?”

별 다른 생각 없는데요? 아무리 나와 가깝게 지낸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죠.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이니까요.”

 

생각 편해서 좋겠다. 내가 원하던 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제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상식이 첨언했다.

 

, 다른 종류의 대답을 원하시는군요? 그냥 가까운 사람이라면 저 정도로 넘어가겠죠. 하지만 내가 마음에 특별하게 품고 있는 어떤 존재가 그런 것을 안다면 질투하겠죠. 나보다 더 그 사람과 가깝게 지내고 있는 상대에게요.”

특별하다는 게…….”

저 같은 경우는 사랑이었습니다.”

 

백기를 향하는 나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백기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향해 질투라는 감정을 갖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아니다. 질투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합니다. 도련님, 장백기라는 사람 대체 뭡니까?”

구원자.”

?”

내 심장을 고쳐주는 사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나를 구해주는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백기는 자신을 고통 속에서 구원해주는 사람이었고 마음의 평정을 찾게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감정을 품을 수는 없다. 그 날의 단편적인 기억으로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을 뿐더러, 백기는 자신을 기억조차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이 아니다. 사랑일 수 없다. 해준은 다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Heart Beat Faster

자각

 

 

 

 

 

백기 때문에 심장이 아팠던 건 그 날이 처음이 아니었잖아.

 

해준은 모아두었던 사진첩 하나를 넘기며 과거를 회상했다. 교복 차림의 앳된 소년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묻힌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이 사진을 보며 스무 살의 자신은 처음 부모님이 아닌 존재 때문에 심장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었다.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아서 약의 힘까지 빌렸었다. 지금은 이 사진을 봐도 심장이 아프지 않다. 대신 앳된 백기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창 밖에서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있던 앨범을 덮고 창밖을 살피니 그 웃음의 중심에는 백기가 있었다.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았던 백기는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변화했다. 적극적으로 변해서 제가 잘못한 것은 확실하게 지적받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쉬는 날에는 저를 찾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용인들의 일을 도우며 그들과 가까워져갔다. 백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따뜻함은 모두가 느끼는 것 같았다. 사용인들과 백기가 날이 갈수록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과거에 절 아프게 했던 사진은 이제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았지만 지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는 백기는 제 심장을 아프게 자극했다. 그 때는 질투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가 그 때 했던 것도,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질투가 맞다.

 

제 앞에서는 딱 굳어서 잘 웃지도 못하는 사람이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쉽게 웃고 떠든다. 보는 시간은 저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긺에도 말이다. 해준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마음이 삐죽삐죽하게 튀었다. 책장 한 곳에 비치된 약을 들어 입에 넣고 삼켰다.

 

백기는 나에게 있어 약이 될까 독이 될까. 여전히 백기라는 존재가 저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

 

격조하였습니다. 사실 절대안정하라는 의사쌤의 강력경고를 듣고 좀 쉬었지만..

뭐 어차피 일도 쉬지 않고 하고 있는걸요. 계속 쉬어봐야 원고 감각만 죽을 것 같아서 조금씩 써 보고자 합니다.

 

 

+백업계 이동중입니다. 지금은 함께 업로드하고 있지만 조만간 포스타입 위주로만 운영하게 될 것 같아 아래에 주소 첨부해 둡니다.

http://sideb25.postype.com